어릴적부터 인형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커다란 인형이건, 작은 인형이건,
종이인형이건, 헝겊인형이건. 인형이라면 뭐든 좋아했었다.
특히 '새라'라고 부르면서 어딜가나 항상 가지고 다니던 커다란 여자아이 인형은, 내 친구와도 같았다.
엄마가 말하기를 어릴적 내가 밥먹을때도, 목욕할때도, 할머니댁에 놀러갈때도 이 새라 인형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잠잘때 만큼은 새라에게 '너는 여기서 자, 잘자!'라고 뽀뽀를 하고 인사를 한뒤
거실에 있는 쇼파위에 조심스럽게 새라를 눕혀 이불을 덮어주고 나는 엄마 품에 폭 안겨서 잠을 잤다고 한다.
내가 새라를 좋아했던것만큼, 나는 그 아이를 무서워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라가 내가 잠들고 난 뒤 뚜벅뚜벅 걸어서 내 머리를 콩! 쥐어박을지도 모를거라는
엄청난 상상을 했을지도.
어쨌거나 인형이라는 것은 나에게 정말로 가까운 친구지만 또 그만큼 섬뜩하기도 한 존재이다.
언제부터인가 '인형'이라는 녀석들은 영화 속에서 실로 엄청난 역할을 하는 아이들로 되어버렸기때문에,
'인형? 예쁘고 귀여워!'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인형? 조금 무섭고 섬뜩해.'라는 생각이 들곤한다.
사람보다 더 무서운 영화 속 '인형'들, 어떤 것들이 있을까.
사탄의 인형
인형이 등장하는 공포영화를 생각해 내라고 한다면, 단연 '사탄의 인형'이 최고 중에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어린이들의 친구인 'Good guy'인형과 타락한 영혼을 가진 살인범의 만남.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잔인한 살인마, 게다가 그 살인마가 우리들이 좋아하는 인형이라는 점.
사탄의 인형을 볼 때면 항상 그런 평범한 인형이 더이상 내 친구일수가 없다는 점 때문에 괜히 소름이 오싹오싹 끼친다.
그런 이유때문에 개인적으로 '사탄의 인형1'편이 가장 섬뜩하고 무섭다.
어린 아이의 시선에서 자신과 대화를 하는 인형이라면 얼마나 그 인형이 예쁘고 사랑스럽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고 아끼던 '처키'가 알고보니 끔찍한 살인마라는 것,
내가 주인공 아이였다면 아마 정신병에 걸리지 않고서야 살수가 없을것같은데,
이상하게도 영화 속 아이는 무럭무럭 잘 커서 3편에서는 군대까지 가버린다.
'사탄의 인형'에서의 처키가 타 공포영화에 비해 주는 자극은 비단 '인형이기 때문에'만은 아니다.
잔인하고 징그러운것으로 따지자면 물론 사탄의 인형을 가볍게 눌러버릴 영화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사탄의 인형'을 보면서 '으악!'소리를 내며 엄마의 팔을 덥썩 잡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이 주인공 아이처럼 인형에게 애착을 가지고 대화를 해본적이 한번쯤은 다들 있던 '경험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들이 했던 대화는 내가 말하고 인형은 듣기만하는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이였겠지만 말이다.
만약 그 때 그 인형이 '배고프지? 엄마가 맘마해줄께.'라는 내 혼잣말에 '그래,'라고 대답을 했다면?
만약 내가 가지고 놀던 말하는 인형이 알고보니 베터리도 끼지 않은 새 인형이였다면?
만약 잠에서 깨었을때, 머리맡에 두고 잤던 그 인형이 문앞에 떨어져있다면?
'처키'는 그냥 아이들이 보기에 '무서운 인형'일 뿐 아니라 어른들의 기억속에서 조용히 잠자고있던
'옛날 그 인형'에 대한 추억도 꺼집어내 공포감으로 바꿔주는 섬뜩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I'll be back.'은 터미네이터의 아놀드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나, 싶을정도로
처키는 자꾸만 자꾸만 살아서 돌아오고 돌아왔지만, 솔직한 이야기로 4탄인 처키의 신부와 5탄인 처키의 씨앗은
괜히 만들어 붙인 '사족'같은 영화다.
섬뜩한 처키의 '순수한 인형+악마같은 살인자'라는 모티브가 이 두편의 영화로 완전히 코미디물이 되어버렸다.
처키가 나에게 주는 정말 섬짓한 공포심은 미안하지만 3편까지일 뿐이다.
인형사
영화 '인형사' 또한 '어릴적 잊고 있던 인형에 관한 추억'을 조금 건들면서 우리들에게 인형이라는 아이들이
과연 어떤 존재였을까,를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였다.
특히나 한창 유행이던, 그리고 지금도 왠만한 용돈으로는 턱없이 비싸지만 아주 잘 팔리고있는
구체관절인형이 영화 속 공포의 키워드이다.
구체관절인형의 특유 아름다운 외관과 예쁘지만 너무나도 차가워서 감정조차 없을 것같은 눈동자가 미묘하게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솔직한 이야기로 이 영화는 영화 자체의 무서움에 대한 포스보다는 그런 인형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숨막힐것같은 오싹함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이 주요 공포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어릴적 둘도 없는 친구였던 그 아이는 언제나 말없이 내 곁에 있어주었고, 내가 짜증을 낼때도
너무나도 기뻐 눈물을 찔끔흘리며 방방 뛰어다닐때도 내 곁에 있어 주었지만, 나는 나이를 먹고 시간을 보내면서
그 아이를 점점 잊어갔다. 그리고 잊혀진 그 아이는 나도모르고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조용히 죽어갔고
그 아이의 죽음조차도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기억조차 나지 않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되어버렸다.
'인형사'는 만약 그 인형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영혼'이 있다면? 그래서 그 아이들이 우리를 기억한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진다.
만약 그 아이들이 잊혀진 우리기억속에서 튀어나와 내 눈앞에 사람의 모습이 되어서 나타난다면,
우린 그 아이들과 친구가 될까, 아니면 그 아이들을 무서워할까.
하나코
영화 '하나코'는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인형이 나오는 무서운 영화라기 보다는 학교괴담을 다룬 영화이다.
'인형'이라는 녀석이 차지하는 비중또한 굉장히 작긴 하지만, 그래도 그 녀석이 영화 속에서 '공포감을 조성하는'역할을
한몫 톡톡히 해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영화 '하나코'는 내용 자체로는 나에게 커다란 매력요소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세 주인공이 인형을 잡아 관속에
처넣고 미쳐 관 뚜껑을 닫지 못했을 때 씨익, 웃고 있는 인형의 모습이 놀랍도록 섬뜩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부터는 일본인형이 괜시리 살아있는 무언가같다는 생각이 든다.
'히나마쓰리'(3월3일 여자아이의 날)에도 이런 일본의 전통인형으로 잔뜩 장식을 하는 사진들을
이곳저곳 책을 통해 많이 봤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이런 인형이 무섭지도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역시 일본은 온갖 귀신과 괴담이 득실득실한 나라라고 하더니, 인형까지도 무섭구나!라는
묘한 편견아닌 편견이 한줄더 늘어나게 만들어져버린 영화였다.
분노의 인형들(Dolls)
초등학생 때였다. 이 영화를 봤던 것이.
적지않게 충격적인 영화였고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 여자아이의 새엄마가 작은 인형들에게 집단으로 칼부림을 당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소름이 쫙쫙 끼친다.
영화가 꽤나 오래전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지금에와서야 생각해보건데, 이 영화는 유치한 면이 없지않아 있다.
특수효과라던지, 인형들의 움직임이라던지 등이 현재 개봉되고있는 영화들에과 비교하자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87년도에 개봉되었던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그렇게 촌스러운 영상이 나름대로의 '오래된 공포영화의 미학'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철저하게 권선징악을 지키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기에 좋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앙증맞은 인형들이 새엄마의 손목을 톱으로 슥삭슥삭 잘라내는 장면을 보여주기에는 조금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따지면, '인형에게 잘해주세요. 안그러면 확 뒤집어 엎어버릴꺼야.'라는 걸 말하고있을지도 모르는
이 영화는, 어린 내가 봤을 땐 입이 떡벌어지게 징그러운 내용들이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건데,
사탄의 인형이 주는 섬뜩함보다는 조금 임팩트가 작은 듯도 싶다.
데드 사일런스
데드 사일런스에서도 인형이 등장한다.
위에서 소개한 영화 속에서 나왔던 인형들이 여러종류였던 것처럼,
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인형또한 조금은 생소하고 독특하다.
'복화술'
말하는 사람은 한명이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리는 신기한 쇼,
그리고 그 무대위에 복화술사보다도 더 집중받는 주인공이 바로 이 영화 속 공포 키워드인 인형이다.
나름대로의 공포감있는 진행이 흥미롭고, 사람들이 차례차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에
복화술인형과 똑같은 모습으로 발견된다는 점이 또 하나의 공포 키워드.
타 영화들이 '인형이 사람을 죽인다', '인형과 사람이 싸운다'라는 전제하에 공포감을 형성하는 데에 비해서
이 영화는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인형과 사람의 이렇다할 경계선이 뚜렷히 없다는 점에대한 비명을 지르게 된다.
과연 마리오네뜨의 실을 쥐고 있는 자는 살아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딱딱한 인형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는 마지막 반전 부분에서 공포의 최정점을 달린다.
'소리를 지르면 죽는다'라는 공포의 법칙이 존재하는 영화 속에서
'그러면 소리르지르지 않으면 되잖아?'라고 반문하는 주인공조차도 비명을 지르게 만든 인형들의 섬뜩한 공포.
아직도 내 방에는 인형들이 참 많다.
물론 예전에 내가 가지고 놀던 손떼묻은 아이들은 이미 사라져버린지 오래이다.
어쩌면 우리집 어느 한구석에선가 '나 아직 여기에 있어'라고 조용히 속삭이고 있을지도.
커다란 곰돌이 인형과 자그마한 곰, 토끼, 강아지 인형들이 즐비하고 있는 내 방도
내가 잠들고 난 한밤중이면 또 시끌시끌해지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많이 커버린 것같은 느낌이 든다.
이젠 예전처럼 '인형'이라는 아이들에게 순수한 사랑을 주고, 또 순수한 공포심을 느낄수없을만큼
내가 부쩍 커버린것일까.
더이상은 친구일 수도, 같이 나란히 앉아 나혼자 말하고있을 뿐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수도,
또 바깥에 나갈때면 항상 내 팔안에 안겨있을 수도 없는 아이들이지만,
마음속에서 그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가끔 새록새록떠오를 때면 왠지모르게 내가
너무 커버린 것같아서 조금은 슬프기도 하다.
친근함? 무서움? 슬픔?
도대체 내가 그 아이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몇가지나 되는 것일까. 조금 더 지켜봐야할 것같다는 느낌이 든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